예약없이 가는 자리
kafoc  |  08/03/21  |  조회: 904  

                                                                                                                                                  所陽 송동진 논설위원

예약없이 가는 자리

미국은 연방 공휴일 연휴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난다. 특별히 5월말쯤 메모리얼 연휴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여행갈 준비를 한다. 아마 날씨도 좋은데다 년말 년초 연휴를 지난지가 오래되어서 기다렸다는 듯 떠난다. 그런데 국립공원 같은 곳은 캠핑 장소나 숙박실을 예약 하지 않고 떠나게 되면 많은 어려움이 있다.

도시에서 두 세시간 거리의 산이나 호수 주변 가까운 캠핑장일수록 예약을 받지 않는다. 예약없이도 캠핑 시즌에는 항상 캠퍼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도착순서 데로 자리를 정하는 이런 곳은 새벽에 와서 자리를 확보하든지 해야한다.

사람이 잠시 들렸다 가는 마켓 주차장이든 공연장이든 회의실, 연회실, 또는 종교모임 등등 내가있어야 할 곳에 내가 있어야할 자리가 없다면 불편하다. 어찌보면 인간은 세상에 나와서 죽을 때까지 인생자체가 여행이라 여겨진다. 그 기간이 짧든 길든, “자리” 보전하다 가는 삶이다.

“자리”의 의미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장소(Location/Place)와 쓰임(用/ 직분), 그리고 시간(Term or Period) 이 세가지를 하나로 묶어 생각할 수 있다. 이 세가지중에 “쓰임”을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은, 시간과 공간안에서 어떤 “쓰임”으로 왔다 가느냐의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 된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야별로 회장, 부장, 노동자, 선생, 학생, 군인 등등의 직책으로 어느기간 활동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직책이 그 기간동안 그사람의 자리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성실하게 직책을 감당하며 살았느냐는 물음이 있게 마련이다.

가정에 돌아오면 자식으로서, 아내나 남편, 아버지와 어머니로 조부모와 손자로 천륜으로 정해준 자리를 가족을 위하여 받들고 섬기는 일로 쓰임을 다하며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자리다.

나는 요즈음 자주 로즈 힐 묘역이나 가까운 묘지공원을 찾는일이 많아졌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가족이 상을 당했거나, 교우중에서 세상을 떠나 하관 예식을 할 때 수금(Auto Harp)으로 연주를 통하여 예배의식에 참여하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지난봄에는 많은 분들이 세상을 하직하여 매주마다 한 번정도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40여년전 미국에 와서 처음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는 미국의 장례문화와 공원묘지를 보면서 한국과 많이 다름을 보았다. 한국의 묘지는 봉분을 쌓는데 미국은 봉분없이 밋밋한 곳에 널판지만한 묘비 한장 깔아 놓는게 고작이다. 더우기 한국에서는 “좌청룡 우백호” 하면서 풍수지리를 따지는데 여기는 그저 주위 풍광이나 내 집에서 얼마나 교통이 편리한 곳인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한국도 이제는 좁은 땅에서 장례문화를 바꾸어야 할 때다.

지금은 장례식마다 살펴보는게 따로 있다. 고인이 묻혀질 곳의 풍광도 위치도 아니다. 고인의 약력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구와 결혼하고 자녀와 손주들이 얼마인지, 사회에서나 교회에서의 직분은 무엇이었는지. 약력속에 고인의 살아왔던 “자리”가 한 눈에 보인다.

이력이 화려하든 단순하든 중요하지 않다. 나는 활자화된 고인의 자리에서 고인을 떠 올려 본다. 누구의 남편이었고 아내였으며, 누구의 아버지였으며 가장으로서, 그리고 소속된 사회 공동체에서 받은 직분은 무엇이며, 직분에 합당한 “쓰임”이 잘 마무리 되고 떠났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곤한다. 그 살아온 흔적이 고단했는지 평탄했는지는 모른다. 또한 그 것이 중요하지도 않다. 그 것은 같이 살아온 유족들이 같이 공유하며 살아 왔기 때문이고 유족들의 몫이다.

이제 고인의 “자리”는 묻혀 있는 묘지가 아니다. 살아오면서 관계를 맺어온 모든 사람들과 유족들의 가슴속에 사랑으로 “자리”매김 하여 영원히 머물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현재의 나의 자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본다. 나의 자리는 잘 쓰여지고 있는가? 예약없이 들어갈 수 있는 그 자리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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